양승진 기자의 실수연발 ‘영어 맛 익히기’
나와 영어의 첫 만남은 평범했다. 누구나 그렇듯 중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알파벳을 배우고 기본 단어를 익혔다. 선생님은 무조건 영어교과서를 외우라고 했지만, 어린 나이에도 외국어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갖고 있었는지 그냥 외우기는 만만치 않았다. 교과서 본문을 제대로 못 외우면 여지없이 손바닥을 맞다 보니, 내게 영어수업은 무조건 외우거나 혼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영어에 대한 열의 대신 ‘그냥 남하는 만큼만 한다’는 인식이 머리에 남았다. 이런 수동적인 인식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종지부를 찍었다. ‘사건’이란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과의 첫 면담시간. 선생님은 입학 전 겨울방학 동안 무슨 영어참고서를 읽었는지 물었다(담임선생님은 강남에서 막 전근오셨던 터라 학생들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았다). 나는 아무 책도 읽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XX종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구?” “저는 XX기본도 본 적이 없는데요.” 나의 대답에 선생님의 얼굴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 집은 과외를 할 형편이 아니었고, 부모님 또한 선행학습은커녕 진도를 따라가는 공부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혼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려니 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선생님과의 첫 면담에서 알게 된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이미 기초적인 문법책을 모두 공부했다는 것, 심지어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 윗 단계의 책을 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말이 강한 동기가 됐다. 남들이 보는 XX기본이 싫어 그보다 쉬운 XX맨 시리즈를 하루 세 시간씩 붙들고 늘어졌다. 처음에는 한번 읽는 데 두 달 가량이 필요했던 문법책이 다시 볼 때는 한 달도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몇 번을 더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영어성적은 평범한 수준에서 최상위층으로 올라갔고, 결국 한 단계 더 높은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숲에 한번 불이 붙으면 쉽게 진화하기 어렵듯 영어에 대해, 어학에 대해서 붙은 흥미는 점점 더 커졌다. 고등학교 2학년 중반, 이제 문법책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 됐다. “오늘 숙제가 뭐냐?” 영어에 대한 ‘늦바람’은 결국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처음 들은 영어수업은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외국인 선생님이 1학년 1학기부터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끼리 우르르 모여서 그날의 숙제가 뭐였는지 서로 물어봐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습득한 ‘빵빵한’ 문법과 단어실력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좌절감이 밀려왔다. 영어를 좋아하게 되어 영문학 전공으로 입학했지만 청취의 벽은 고무신 거꾸로 신은 애인처럼 높기만 했다. 문어체, 단어, 독해 위주의 영어에서 회화, 청취, 작문 중심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우연히 가입한 동아리가 IGS(International Goodwill Society). 1960년 영국대사관에서 태동해 현재는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IGS는 여러 대학 학생과 직장인이 참여하는 ‘연합동아리’였고, 영어토론에 능숙한 회원이 많았다. 5~6명이 한 그룹을 이뤄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 중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영어로 자유토론을 한다. 내가 처음 토론에 참가했을 때의 주제는 ‘사람들이 왜 IGS에 와서 영어를 같이 공부하고 유대관계를 갖느냐’는 것. 나는 토론주제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을 정도로 청취력이 형편없었고, 생전 한국말로도 토론을 해본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나는 각 소그룹 토의의 진행자가 던진 질문에 “I can’t speak English”라는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6년을 넘게 영어공부를 하고 영문학을 전공한다면서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나는 영어를 못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현실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다. 자투리 시간의 위력 이후 매주 화요일이면 명동 가톨릭 여학생회관에 갔다. 알아듣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엄청났지만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회원들이 운영하는 영어스터디에도 참여해 영어주간지 독해연습, 단어장 외우기, 영자신문 기사 번역하기, 주제별로 기사를 읽고 영어로 토론하기 등으로 실력을 쌓아갔다. 다음 주에 나오는 주제를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관련 자료를 뒤지기도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보내니 토론시간에 남이 하는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한 시간 넘게 영어로 듣고 말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차츰 영어토론에서의 이해도와 참여도가 높아졌다. 만 2년이 지나자 비록 발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논쟁적이고 시사적인 주제를 영어로 표현할 수 있었고, 글을 쓰면서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학원에서는 더욱 배우기 힘든) 실전 영어를 익히게 됐다. 슬슬 자신감이 생겨났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영어에세이 쓰기도 남들보다 앞서 나갔고 영문학 수업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당시 영문과에 계시던 피터 플레밍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나를 보고 따로 영작을 가르쳐 주셨다. 교수님과 같이 저녁을 먹으며 영어로 토론도 하고 발음교정도 받았다. 한마디로 내 인생의 ‘영어공부 풍요기’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가야 하는 국방의 의무가 문제였다. 현역으로 영장이 나와 강원도 모 부대로 입대했다. 군에서 영어공부는 사치와도 같았다. 당시만 해도 원칙적으로 부대 내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특히 신참병의 경우는 신문도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면제나 방위, 아니면 카투사도 가는 마당에 2년 넘게 영어공부를 못하게 된 현실이 너무 암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지 않은가. 스스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 부탁해 외국주간지를 우편으로 받아, 몇 장씩 뜯어서 옷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틈만 나면(주로 화장실에서) 미친 듯이 읽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면서 바로 외웠다고 하는 편이 옳다. 영어공부를 할 만한 시간은 따로 주어지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5분, 10분의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단어와 문장을 달달 외웠다. 짬짬이 남몰래 한 공부 덕분에 제대할 때 영어실력은 그나마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대 직전 그간 격려와 영어편지를 보내주시던 플레밍 교수님이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교수님은 생전에 제대 후 내가 미국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게 추천해주셨다. 집안사정이 어려운 내게 이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결국 그 덕분에 제대 후 한학기를 마치고 교환학생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예상치 못했던 1년 간의 미국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들이 영어맛을 알아?” 지정된 학교에 도착해 영문과 수업을 들었지만 구어체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당혹스러운 경우를 종종 만났다.미국 본토의 맥도널드 가게에서 ‘쇼’를 했던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차례가 되자 직원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히투고?”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가슴이 철렁했다. 뇌염(encephalitis)이나 복마전(pandemonium) 같이 복잡한 단어는 열심히 외웠지만, 분명 그리 어려운 뜻이 아닐 것임이 분명한 “히투고”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직원이 다시 한번 “히어투고?”라고 천천히 말해주었지만 긴장한 나는 “예스”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1번 메뉴 주세요 (Number one, please)”를 반복했지만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배는 고프고, 얼굴은 붉어지고, 메뉴를 시켰는데 음식은 안 주고 이상한 질문이나 던지고, 뒤에서 사람은 기다리고, 내가 뭐라고 하면 자기들끼리 웃기만 하고…. 일상회화를 중심으로 영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히어투고?”가 “Here or to go?”라는 것, 맥도널드 같은 곳에서 “가져가실 거예요? 아니면, 여기서 드실 거예요?”라는 뜻으로 일상적으로 손님에게 물어보는 표현이라는 사실, 빨리 발음하다 보면 히투고로 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표현만 접해 딱딱한 문어체와 예의 바른 경어체가 입에 붙은 대한민국 토종이 어떻게 단시간에 여기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생활비가 넉넉지 못하다 보니 정말 필사적으로 돈을 아껴가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신기한 것은 미국에서 영문과 수업을 듣기 시작한 초기부터 교수들이 필자의 에세이나 문학비평리포트를 읽은 후 보인 반응. “어디서 영어를 배웠느냐?” “한국에서만 공부를 한 게 사실이냐?” 등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매진해왔던 동아리활동과 학교숙제, 군대에서의 ‘틈틈이 공부’가 미국에서 뜻하지 않은 힘이 되어준 것이다. 무조건 많이 읽고, 쓰고, 듣는 과정을 반복한 덕분이었다. 연수 1년으론 어림도 없다 결론적으로 영어공부의 진전은 토종이냐 아니냐는 ‘출신성분’과는 별개이며, 오히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우연히 교환학생의 기회를 잡았지만 1년 정도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다녀온다고 해서 영어실력이 급속히 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지만 제대로 문화를 이해하고 언어적으로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성인의 경우 최소 4~5년이 걸린다. 대부분의 토종 영어 학습자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눈물과 정성으로 외우고 또 외워서 익힌 정식영어, 소위 ‘global current English’는 어디서나 힘을 발휘한다. 이는 내가 영문학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버팀목이었고, 이후 기자생활에서는 더 큰 효용성을 발휘했다. 이러한 영어는 미국에서만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내에서도 의지와 꾸준한 학습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다. 오히려 경계할 것은 어학연수를 다녀왔다고 해서 현지의 화려한 속어나 특이한 구어체 표현을 남발하는 일이다. 그보다는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단어나 표현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말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이 경쟁력을 올리는 수단이란 점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인 토종 학습자가 실용영어를 습득하기 위한 환경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당장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정성을 다해 공부한다면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 만약 아직도 ‘공부하기에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탈무드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라. “And if not now, when?” 출처: 신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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